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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공부쟁이
삼성 이건희 회장 별세. 별이 지다. 본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삼성을 1등 기업으로 키우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삼성도 없을 것이다.
이 회장은 1942년 1월 대구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 맹희와 창희, 그리고 누나 인희, 숙희, 순희, 덕희가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명희가 생겼다. 당시 삼성의 창업자인 아버지(이병철 회장)와 어머니(박두을)는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삼성상회를 경영했는데 무척 바빠 아이를 키울 시간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젖을 떼자마자 경남 의령의 친가에 보내져 그곳에서 3년 동안 자랐다.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47년 아버지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 부산, 마산 등으로 이사했다. 53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당시 이 회장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난다. 이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에 대해 “혼자 자라서 가정교육은 1%도 받지 못했다”라고 말한 적 있다.
일본 유학을 갈 때만 해도 이 회장은 그룹 후계자에서 제외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학을 떠나기 전 아버지는 아들에게 “경영학을 하면서 매스컴에도 신경 써서 공부하라”라고 주문했다. 가업보다는 언론 관련 사업을 맡길 생각이 컸던 것이다. 65년 와세다대를 졸업한 이 회장은 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에서 MBA 과정을 수료한 뒤 돌아와 동양방송에 입사했다.
66년 9월 ‘사카린 밀수 사건’의 주범으로 삼성이 지목되면서 아버지는 은퇴를 선언한다. 이때 그룹 총수의 자리는 잠시 장남 맹희씨에게 넘어간다. 그러나 그는 68년 6월 경영 일선에 복귀했고,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이 회장은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사재를 털어 74년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 회장은 이후 78년 삼성물산 부회장, 79년 삼성그룹 부회장에 올라 공식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87년 11월 아버지가 숨을 거둔 뒤 곧바로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의 회장 취임 일성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약속은 허황된 소리처럼 들렸지만 약속은 결국 지켜졌다. 끈질긴 승부 정신과 치열한 기업 경영의 결과다.
이 회장은 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품질경영과 세계1등 유전자(DNA)를 삼성그룹 전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켰다. 이후에도 ‘채용 시 학력제한 철폐’ ‘96년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을 위한 혁명’ 등 지속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특히 삼성이 성공에 도취해 있을 때 경종을 울리며 조직을 다잡았다.
삼성이 96년 비상경영에 들어갔고 이듬해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위기에 미리 대비한 삼성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오히려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삼성을 세계 제일로 이끌며 승승장구하던 이 회장의 시련은 경영 승계 문제에서 시작됐다. 2000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가 편법으로 이뤄졌다는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했다.
특검까지 간 이 사건은 2009년 5월 대법원 판결로 이 회장이 배임혐의를 벗는 데 성공했지만, 조세포탈 혐의에 대한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이 확정됐다. 2007년 10월에는 삼성그룹 구조조정 본부에서 법무팀장을 지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이 2002년 대선 때 비자금을 제공하고 현직 검찰 주요 간부에게 500만~1000만 원씩 정기적으로 상납했다’고 폭로했다.
비자금 조성 및 정관계 로비 의혹 등이 모두 무혐의로 처리됐지만, 이 회장은 2008년 4월 대국민 사과를 발표한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후 세계 경제가 금융위기 한파에 시달리면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던 2010년 경영에 복귀해 위기 극복을 위한 리더십을 다시 한번 발휘한다. 그 결과 삼성은 스마트폰과 TV에서 놀라운 실적을 냈고, 2012년 매출 300조를 돌파했다.
이 회장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강력한 리더였다. 끊임없이 다가올 위기를 대비했고, 과감한 투자로 삼성을 세계 제일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의 공과를 둘러싼 논란이 존재하지만 그의 비범한 능력과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삼성이라는 전 세계적인 브랜드도 없었다는 데는 이견을 내는 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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